차기 WHO 사무총장 선출을 앞두고 다시 소환된 할프단 말러의 일차보건의료 유산

배경
세계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 WHO)의 차기 사무총장 선출 국면을 앞두고 국제 보건 거버넌스의 역사적 궤적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국제 의학 학술지 랜싯(The Lancet)의 리차드 호튼(Richard Horton) 편집장이 최근 오프라인(Offline) 칼럼에서 차기 수장 선출을 다루며 역대 지도자들의 행적을 짚은 데서 논의가 촉발됐다. 당시 기고는 1988년부터 1998년까지 재임한 제4대 사무총장 나카지마 히로시(Hiroshi Nakajima) 시절부터 분석을 시작했다. 보건 정책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이전 15년간 조직을 이끌며 현대 공공보건의 기틀을 다진 제3대 사무총장 할프단 말러(Halfdan Mahler)의 공적을 누락해서는 온전한 방향성을 찾기 어렵다는 문제의식이 제기됐다.
보건 안보 위기와 다자주의 후퇴, 지정학적 분열이 겹친 현재, 국제기구의 존립 목적과 사명을 묻는 목소리는 여느 때보다 높다. 코로나19 대유행을 겪으며 각국이 국경을 닫고 자국 중심주의적 백신 확보에 매달리면서 글로벌 보건 불평등은 한층 심화됐다. 초국가적 보건 위기 대응에서 국제기구의 지도력이 흔들리는 상황이다. 단순한 행정 관리를 넘어 보건 정의를 실천했던 과거 지도자의 통찰을 되짚어보는 작업은 향후 보건 외교와 정책 수립에 필수적인 나침반 구실을 한다.
핵심 발견
이번 서한은 1973년부터 1988년까지 3연임하며 기구를 이끈 말러 전 총장의 역사적 유산에 주목한다. 호튼 편집장이 나카지마 전 총장 이후의 현대적 관료제 리더십에 무게를 둔 시각을 짚으며, 말러 전 총장이 구축한 철학과 구조적 결단이야말로 차기 지도자가 계승해야 할 핵심 자산이라고 강조했다. 말러 전 총장의 재임기는 미소 냉전이라는 이념 대립이 극에 달했던 시절이었으나, 오히려 보건을 기본적 인권으로 규정하는 합의를 끌어냈다.
대표적인 결실은 1978년 구소련 알마아타(Alma-Ata)에서 열린 국제회의와 이를 바탕으로 채택된 알마아타 선언이다. 말러 전 총장은 2000년까지 모든 이에게 건강을(Health for All by the Year 2000)이라는 담대한 목표를 천명하며 일차보건의료(Primary Health Care, PHC) 개념을 체계화했다. 고비용 대형 병원과 기술 중심 치료 의학에 편중되던 자원을 지역사회 기반의 예방, 기초 위생, 필수 치료로 전환하는 패러다임 전환을 이뤄낸 셈이다.
의약품 접근성 분야에서도 기초를 닦았다. 1977년 세계 최초로 제정된 필수의약품 목록(Model List of Essential Medicines)이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필수 치료제를 공공재 성격으로 규정하고, 개도국을 비롯한 각국 보건 당국이 적정 비용으로 양질의 약품을 조달하도록 지원하는 체계를 완성했다. 다국적 제약사의 상업적 압력 속에서도 공공보건의 우선순위를 지켜낸 결단으로 평가받는다.
의미와 전망
말러가 남긴 보건 철학은 차기 수장이 직면할 거버넌스 위기를 돌파하는 원칙을 제시한다. 현재 국제 보건 환경은 기후 위기에 따른 감염병 다변화, 만성질환 부담 증가, 인공지능 기반 디지털 헬스케어의 확장 등 다층적 과제에 직면해 있다. 첨단 의료 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기초 의료 인프라의 붕괴와 지역 간 치료 격차는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난제로 남아 있다.
신임 사무총장이 마주할 핵심 과제는 주요 공여국의 정치적 압박과 민간 자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규범 설정 기구로서 위상을 회복하는 일이다. 기구 예산의 상당 부분이 특정 목적을 지정한 자발적 기여금에 의존하면서 사업의 자율성이 침해받는다는 우려가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취약 계층의 일차의료를 우선시하고 상업적 이해관계에 맞서 보건 형평성을 지키려 분투했던 말러의 실행력은 상업화된 의료 생태계 속에서 공공의 역할을 재정립하는 기준을 마련해 준다.
In his recent Offline on the upcoming elections for the new Director-General of WHO,1 Richard Horton mentions several of the previous Director-Generals, starting with Hiroshi Nakajima (1988–98); however, I believe the achievements of Halfdan Mahler (1973–88) should also be highlighted.2,3
말러의 일차보건의료 유산은 현대 제약·바이오 산업과 각국 보건의료 현장에 구체적인 실행 모델을 제시한다. 고가 세포·유전자 치료제나 표적 항암제 개발에 민간 투자가 집중되는 사이, 필수 항생제와 기초 백신의 공급망이 마비되는 수급 불안정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글로벌 제약사와 각국 보건 당국은 첨단 치료제 개발에 머무르지 않고, 현장 보건소와 지역사회 클리닉에서 작동 가능한 전달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필수의약품 목록을 최신 치료제로 유연하게 개편하고, 저개발국에 생산 기술을 이전하며, 공공 조달을 안정화하는 정책이 결합할 때 진정한 보건 안보가 완성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