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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 노벨상이 멈춘 해

나치 유럽 대점령으로 노벨상이 정지된 해. 그러나 옥스퍼드에서는 페니실린 대량 정제가, 뉴욕에서는 Rh 인자 발견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시스템 다운타임 뒤의 백그라운드 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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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 노벨상이 멈춘 해

이 글을 읽으면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과학상이 어떻게 한 시대 동안 완전히 정지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 정지기에도 뒤에서 진행되던 결정적 과학 연구들이 무엇이었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시스템 다운타임 — 노벨상의 6년 공백

노벨 생리의학상은 1901년 시작 이후 매년 수여되어 왔습니다. 몇 해의 예외(1915~1918, 1921, 1925 등)가 있었지만, 이런 예외는 대개 "올해 후보 중 상 받을 만한 것이 없다" 는 위원회의 판단이었습니다. 상 시스템 자체는 계속 작동했습니다.

그러나 1940~1942년의 공백은 성격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상 시스템 자체가 정지된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노벨 재단의 정상 작동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스템 다운타임의 배경, 이 시기 뒤에서 진행되던 결정적 발견들, 그리고 다운타임 종료 후 지연 수여된 상들 — 이것이 이 특집편의 내용입니다.

CS 비유가 여기서 자연스럽게 관통합니다. 이것은 시스템 다운타임과 백그라운드 프로세스 의 관계와 유사합니다.

큰 서비스가 다운되면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응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종종 백그라운드 작업들 — 배치 처리, 로그 수집, 데이터 동기화 — 은 어떤 형태로든 계속 됩니다. 서비스가 다시 온라인이 됐을 때, 그 백그라운드 작업들의 결과가 쌓여 있어서 새 서비스 사이클에 반영됩니다.

노벨상이 정지된 이 시기에도 세계의 실험실들은 대부분 계속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다운된 것은 상의 인정 시스템이지, 과학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 진행된 연구들이 전후 노벨상의 첫 몇 년에 걸쳐 대량으로 수상됩니다.


시대의 풍경 — 유럽의 대점령과 노벨재단의 결단

1940년의 세계는 나치가 유럽 대륙을 대대적으로 점령한 해 였습니다.

4월 나치가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 합니다. 노벨 재단의 본부가 있는 스톡홀름은 중립국 스웨덴에 있었지만, 옆 나라 노르웨이가 나치 점령 하에 놓인 것이 큰 문제였습니다. 노벨 평화상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수여되는데, 노르웨이 노벨 위원회 위원들이 나치의 감시를 받게 됐습니다.

5월 나치가 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 를 침공합니다. 6월 프랑스가 항복 합니다. 6주 만에 서유럽 대륙 전체가 나치 지배 하에 들어갔습니다. 헤이만스(1938 수상자)의 벨기에도, 뢰비의 오스트리아(이미 병합)도 나치 점령 지역이 됐습니다.

7~10월 배틀 오브 브리튼(Battle of Britain). 나치 공군이 영국을 굴복시키기 위한 대공습을 시도했지만 실패합니다. 이것이 나치의 첫 큰 좌절이었고, 영국이 2차 대전의 결정적 저항 거점이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특히 중요한 것은, 옥스퍼드의 페니실린 팀이 이 공습 중에도 연구를 계속했다는 사실 입니다.

노벨 재단은 이런 상황에서 결정적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나치 협력 압력 이 컸습니다. 나치는 스웨덴 정부에 여러 요구를 했고, 그중 하나가 나치가 승인하는 인물들에게 노벨상을 주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치는 1935년 카를 폰 오시에츠키(반나치 언론인) 평화상 수여 이후 이 상 시스템을 정치적으로 반대해왔습니다.

노벨 재단의 결단은 정지였습니다. 상을 수여하기보다는 상 자체를 정지시키는 것이 상의 무결성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 결단이 1940~1942년의 완전 공백을 만들었습니다.

한국사와 겹쳐 보면, 1940년은 창씨개명이 시행 된 해이며(2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강제 폐간 된 해(8월)입니다. 유럽에서 세계 최고 권위의 과학상이 시스템 무결성을 지키기 위해 정지되던 그 시기, 조선에서는 언론과 이름을 지킬 시스템 자체가 강제로 파괴되고 있었습니다. 정지의 두 형태 — 자기 방어를 위한 정지와 강제된 파괴 — 가 병렬로 일어난 시대였습니다.


그럼에도 과학은 멈추지 않았다

이 정지기에 뒤에서 진행되던 결정적 연구들이 있었습니다. 그 대부분이 전후 노벨상으로 이어지거나 20세기 후반 의학의 기반이 됩니다.

페니실린 대량 정제 — 옥스퍼드의 지붕 아래

하워드 플로리와 언스트 체인의 옥스퍼드 팀이 1940년 5월 페니실린의 첫 정제된 형태를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그들의 5월 27일 발표 논문 — 「Penicillin as a Chemotherapeutic Agent」 — 이 페니실린을 실험실 호기심에서 임상 약물로 전환시킨 결정적 순간이었습니다.

플레밍이 1928년 페니실리움 곰팡이의 항균 효과를 관찰한 지 12년 만이었습니다. 그 12년 동안 페니실린을 정제하는 방법이 없어서 임상 적용이 불가능했습니다. 옥스퍼드 팀이 극도로 힘든 화학 정제 과정을 개발한 뒤에야 이 약이 실제로 사용 가능해졌습니다.

나치 공습 중 옥스퍼드의 지붕 아래에서 이 연구가 계속됐다 는 사실이 극적입니다. 팀 구성원 중 일부는 만약 나치가 영국을 점령하면 팀의 페니실린 곰팡이 균주를 자기 옷에 문질러 어떻게든 다른 나라로 밀반출하려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 발견의 임상 사용은 미국의 대량 생산 시설로 확대되어 1943년부터 연합군 병사들에게 사용됩니다. 2차 대전 후반 연합군 사상자 수가 크게 감소한 결정적 이유가 페니실린 이었습니다. 이 발견이 1945년 노벨상 으로 플레밍·플로리·체인 공동 수여됩니다. 5년 후의 지연 수여였습니다.

Rh 인자 — 뉴욕의 두 번째 큰 발견

카를 란트슈타이너(1930 수상자) 는 이 시기 뉴욕 록펠러 연구소에서 두 번째 큰 발견을 만들어냈습니다. Rh 인자(Rh factor).

이전 그의 ABO 발견이 서로 다른 사람 간 수혈의 안전성을 확립했다면, Rh 인자 발견은 임산부와 태아 간의 혈액형 부적합 문제를 밝혔습니다. Rh 음성 어머니가 Rh 양성 태아를 임신하면 두 번째 임신부터 심각한 태아 용혈성 질환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 발견 이후 임산부의 Rh 검사가 표준화됐고, 이후 Rh 면역글로불린(RhoGAM) 주사 요법이 개발되어 이 문제가 임상적으로 관리 가능해졌습니다. 오늘 매년 세계에서 수백만 명의 임산부 가 이 검사와 예방 조치의 수혜자입니다.

DDT — 나중 노벨상으로

스위스의 파울 뮐러가 이 시기 DDT의 살충 효과 를 규명하고 있었습니다. 이 발견이 2차 대전 중 티푸스와 말라리아 대응에 결정적으로 기여합니다. 뮐러는 1948년 노벨 생리의학상 을 받게 됩니다.

DDT 이야기는 더 복잡합니다. 처음에는 감염병 대응의 기적 물질로 환영받았지만, 1962년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 이후 환경 유해성이 밝혀지면서 대부분 국가에서 금지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노벨상을 복합적 시각에서 봅니다 — 발견 당시 정확했던 판단이 시간이 지나며 그림자를 드러낸 사례로.

방사성 동위원소 대사 연구

미국에서 조지 데 헤베시가 방사성 동위원소를 이용해 살아있는 몸 안에서 특정 원소의 이동 경로를 추적 하는 방법을 확립하고 있었습니다. 이 방법이 대사 연구의 근본을 바꿉니다. 헤베시는 1943년 노벨 화학상 을 받게 됩니다.


연결 — 이 다운타임에서 나온 것들

1943년 노벨 위원회는 상을 재개하기로 결정합니다. 1940~1942년 공백기의 후보들이 대량으로 심사되기 시작 합니다. 이 시기의 상 수여를 보면:

  • 1943년: Henrik Dam과 Edward Doisy (비타민 K 발견). 두 사람이 이미 1930년대 후반에 완결한 연구.
  • 1944년: Joseph Erlanger와 Herbert Gasser (신경 섬유의 기능적 분화). 이미 1930년대 실증한 연구.
  • 1945년: 플레밍·플로리·체인 (페니실린). 옥스퍼드 팀의 1940년 정제 성공이 결정적이었음.

이 세 상이 다운타임에 쌓여 있던 백그라운드 작업들의 결과 였습니다. 상 시스템이 재가동되자 이 결과들이 순서대로 인정받았습니다.

이 시기의 또 다른 함의는 미국이 세계 과학의 중심으로 부상한 것 이었습니다. 유럽 대륙이 나치 점령 하에 있는 동안, 유럽에서 망명한 과학자들과 미국의 넓은 자원이 결합하면서 미국이 세계 과학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 합니다. 이 흐름이 전후 몇십 년에 걸쳐 확대됩니다.

노벨 재단이 자기 무결성을 지키기 위해 정지시켰던 상 시스템이 오히려 세계 과학의 재편성 을 가속시킨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미국이 자기만의 상 시스템(라스커상 등)을 구축하기 시작하고, 이후 세계 과학의 지리적 중심이 유럽에서 북미로 결정적으로 이동합니다.


우리에게 남긴 교훈

이 정지기가 우리에게 남긴 교훈이 있습니다. "시스템이 정지되어도 그 뒤에서 진행되는 작업들이 있다. 시스템 재가동 시 그 백그라운드가 어떻게 처리되는지가 결정적이다."

큰 조직이 위기로 정지될 때, 그 조직의 표면적 활동은 멈춥니다. 그러나 그 조직 안의 개별 사람들과 작은 팀들은 종종 조용히 계속 일합니다. 조직이 재가동될 때, 이 사람들의 축적된 작업을 어떻게 통합하는가 가 조직의 재건 속도를 결정합니다. 노벨 재단은 이 통합을 잘했습니다 — 19401942년의 결과들이 19431945년의 상 수여로 흘러들었습니다.

또 하나의 교훈: 시스템의 무결성을 지키기 위해 시스템을 잠시 정지하는 것이 옳을 때가 있다. 노벨 재단이 나치 협력을 거부하기 위해 상 자체를 정지시킨 것은 이 상의 미래 신뢰를 지키는 결정이었습니다. 오늘도 조직·서비스가 잠시 정지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옳을 때가 있습니다.

지금 이 문장을 읽는 중에도 세계 여러 곳에서 다양한 시스템 다운타임이 일어나고 있을 것입니다. 그 정지 뒤에서 진행되는 작업들이 재가동 후 무엇이 되는지 — 이것이 종종 정지 자체보다 중요합니다.


1940~1942년 노벨상 공백 요약: 2차 대전 나치 유럽 점령 상황에서 노벨 재단은 상의 무결성을 지키기 위해 시스템을 정지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 옥스퍼드의 페니실린 정제, 뉴욕의 Rh 인자 발견 등 결정적 연구들은 계속됐고, 이 축적이 1943~1945년 상 재가동 시 대량 수여로 흘러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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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 1939년 — 도마크와 프론토실 → 다음: 1943년 — 비타민 K와 지연 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