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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노벨 생리의학상 — 프레더릭 밴팅과 존 매클라우드

1년 반 만에 발견→인간 투여→노벨상까지 압축된 유례없는 속도. 41세 최연소 수상자 밴팅. 그러나 그 뒤에는 네 사람의 갈등과 노벨상 상금 분배의 격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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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노벨 생리의학상 — 프레더릭 밴팅과 존 매클라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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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슐린 발견부터 노벨상까지 1년 반이라는 유례없이 짧은 시간에 벌어진 이야기, 그리고 그 안에서 네 사람이 어떻게 갈등했으며 왜 오늘 우리가 밴팅-매클라우드만 기억하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발견-투여-노벨상 1년 반의 압축

과학 발견에서 노벨상까지의 지연은 보통 10~30년입니다. 발견의 의미가 입증되고, 임상 응용이 검증되고, 후속 연구가 축적되어야 위원회가 확신을 갖기 때문입니다.

인슐린은 예외였습니다:

  • 1921년 여름 — 밴팅과 베스트의 개 실험 성공
  • 1922년 1월 — 첫 인간 투여, 레너드 톰슨 사례
  • 1922년 봄~여름 — 임상 시험 확대, 극적 결과 잇달아 보고
  • 1923년 10월 — 노벨위원회 결정

1년 반입니다. 노벨위원회가 이 정도로 빨리 움직인 것은 그 발견의 임상 임팩트가 너무나 즉각적이고 명백했기 때문입니다. 인슐린 이전 1형 당뇨병 어린이의 예후는 진단 후 몇 달12년 사망이었습니다. 인슐린 이후 그 어린이들이 오늘 우리처럼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대조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압축된 승리 뒤에는 네 사람의 격렬한 갈등이 숨어 있었습니다.


시대의 풍경 — 광란의 20s 절정 진입

1923년은 광란의 20s가 절정으로 진입하던 해입니다. 미국 경제는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재즈가 문화의 주류가 됐으며, 여성 참정권과 새로운 사회 규범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유럽은 아직 전후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회복의 리듬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몇 개 상징적 사건:

  • 독일 초인플레이션 — 마르크가 무너져 종이돈으로 벽지를 붙임
  • 뮌헨 폭동(11월) — 히틀러의 첫 쿠데타 시도 실패. 그의 재판이 그를 유명하게 만들며 나치의 씨앗이 뿌려짐
  • 터키 공화국 선포(10월) — 오스만 제국 종말, 케말 아타튀르크의 근대화
  • BBC 첫 방송(1922년 말) — 대중 매체의 새로운 시대

의학사 관점에서 이 시기는 호르몬 시대의 개막이었습니다. 인슐린이 첫 번째 대량 생산된 호르몬 치료제가 됩니다. 이후 티록신, 코르티솔, 성장호르몬, 인슐린유사성장인자, 성호르몬들이 차례로 정제되어 임상에 들어옵니다. 이 흐름의 원점이 인슐린이었습니다.

한국사와 겹쳐 보면, 1923년은 관동대지진(9월 1일) 이 있던 해입니다. 지진 자체도 재앙이었지만, 그 뒤 일본 정부와 자경단이 조선인 6천여 명을 학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조선인 유학생, 노동자 등 무고한 민간인이 유언비어에 의해 살해됐습니다. 이 사건은 이후 한일 관계의 깊은 상처로 남습니다. 유럽과 북미에서 인슐린이 어린이들을 살리고 있을 때, 조선인들은 이웃 나라에서 학살당하고 있었습니다.


인물 서사 — 네 사람의 격렬한 협업

프레더릭 밴팅 — 아이디어의 원저자

밴팅은 1891년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태어났습니다. 온타리오 서부 시골의 정형외과의였고, 진료가 잘 안 돼서 지역 대학에서 강의를 부업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1920년 10월 30일 밤, 그는 다음날 강의 준비를 하다가 논문 한 편을 읽으며 뜻밖의 통찰을 얻습니다.

이후 그는 자기 아이디어를 실험할 곳을 찾아 여러 대학에 편지를 보냅니다. 대부분 거절되지만, 토론토 대학의 매클라우드가 유일하게 관심을 보입니다. 그는 클리닉 문을 닫고 토론토로 갑니다.

밴팅의 성격은 완고하고 감정적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이디어에 대한 오너십에 극도로 민감했고, 다른 사람의 기여를 인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 성격이 이후 갈등의 뿌리가 됩니다.

찰스 베스트 — 학생 조수

찰스 베스트(Charles Best, 1899~1978) 는 토론토 의대 4학년 학생이었습니다. 매클라우드가 밴팅에게 실험 조수를 붙일 때, 두 학생 중 하나로 뽑혔습니다. 다른 학생 클라크 노블(Clark Noble)과 동전 던지기로 여름 실험 참여를 결정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 이것이 사실이라면, 노블은 인생을 바꾼 동전 던지기에 진 셈입니다.

베스트는 밴팅과 함께 결정적 첫 실험들을 수행합니다. 그러나 그는 학생이었고, 노벨상은 그에게 가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은 밴팅에게 평생 아픈 문제로 남습니다.

존 매클라우드 — 실험실장

존 매클라우드(J.J.R. Macleod, 1876~1935) 는 토론토 대학 생리학과 학과장이었습니다. 그가 없었다면 밴팅의 아이디어는 실험실 없이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1921년 여름 대부분을 유럽 휴가로 보내며 결정적 첫 실험을 밴팅과 베스트에게 맡깁니다. 이 부재가 밴팅에게 "노벨상 지분"에 대한 불만을 심습니다.

매클라우드는 그러나 실험 방법론 설계, 재료 지원, 결과 해석에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노벨위원회는 이것을 인정해 그를 공동 수상자로 결정했습니다. 밴팅은 이 결정에 크게 분노합니다.

제임스 콜립 — 정제의 마법사

제임스 콜립(James Collip, 1892~1965) 은 앨버타 대학의 생화학자였습니다. 매클라우드가 초기 인슐린 추출물의 정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초청한 사람입니다. 밴팅과 베스트의 원 추출물은 부작용이 심해서 첫 인간 투여에서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콜립이 정제법을 크게 개선한 뒤에야 두 번째 투여에서 성공적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 콜립이 실질적으로 인슐린을 임상 사용 가능한 형태로 만든 사람인데, 노벨상은 그에게도 가지 않았습니다.

노벨상 상금 분배와 갈등

밴팅은 노벨상 수상 소식에 격분합니다. 그의 파트너인 베스트가 함께 받지 못했고, 대신 그가 부재로 인해 원망하던 매클라우드가 함께 받은 것에 대해서였습니다. 그는 자기 상금의 절반을 베스트에게 나눠줍니다. 매클라우드는 이에 화답해 자기 상금의 절반을 콜립에게 나눠줍니다. 이 상금 재분배는 노벨위원회의 결정에 대한 두 수상자의 정중한 항의였습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남긴 교훈: 위대한 발견은 종종 여러 사람의 갈등적 협업의 산물입니다. 우리가 오늘 밴팅과 매클라우드의 이름만 기억하는 것은 노벨위원회의 결정 때문이지, 두 사람만이 발견을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핵심 업적 — 잃어버린 신호 호르몬의 복원

1형 당뇨병의 그림

1형 당뇨병은 오늘 우리가 아는 원인 — 자가면역에 의한 췌장 베타 세포 파괴 — 로 이해되기 훨씬 전에 이미 임상적 그림이 잘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1. 어린 나이에 발병
  2. 급격한 체중 감소
  3. 극심한 갈증과 다뇨
  4. 소변에 당이 나옴 (diabetes mellitus)
  5. 케톤산증으로 혼수 및 사망

원인은 인슐린 결핍이지만, 인슐린이라는 물질 자체가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결핍도 정의되지 못했습니다. 밴팅의 실험이 이 결핍을 정의하고, 동시에 그것을 채울 방법을 제공했습니다.

인슐린의 작용

인슐린이 하는 일을 CS 비유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세포는 혈액에서 글루코스를 받아 에너지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세포는 인슐린 없이는 글루코스 수송체(GLUT4)를 세포 표면에 노출하지 않습니다. 인슐린은 세포에게 "글루코스를 받아들여라"라는 신호를 보내는 열쇠입니다.

이것은 소프트웨어에서 가비지 컬렉터의 트리거 신호와 유사합니다. 인슐린은 "혈액 안에 글루코스가 많다, 세포로 흡수하여 저장하라"는 시스템 전체적 신호입니다. 이 신호가 없으면 세포는 글루코스가 넘쳐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혈액 안에 계속 축적됩니다. 이것이 고혈당의 원인이며, 결국 다양한 합병증을 낳습니다.

인슐린은 또한 간에게 저장 명령을 내립니다: "글루코스를 글리코겐으로 저장하라." 그리고 지방 세포에게는 "지방을 만들어 저장하라"고 명령합니다. 즉 인슐린은 저장 신호(anabolic signal) 입니다.

다만 이 비유는 여기서 깨집니다. 소프트웨어 가비지 컬렉터는 완전 자동이고 예측 가능하지만, 인슐린 시스템은 개인마다, 시간마다, 상황마다 다른 감수성을 가집니다. 오늘 우리가 인슐린 저항성(2형 당뇨병)을 이해하는 것도, 이 개인차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입니다.

임상 임팩트

인슐린 첫 투여 이후 몇 개월 안에 세계 각지의 당뇨병 어린이들이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살아나는 어린이들의 모습을 담은 유명한 사진들이 있습니다. 인슐린 투여 전 뼈만 남은 아이들, 몇 주 뒤 회복된 통통한 아이들 — 이 대조가 인슐린의 임팩트를 세계에 각인시켰습니다.

토론토 대학은 인슐린 특허를 1달러에 대학에 양도받고, 이를 세계에 개방합니다. 이 결정이 없었다면 인슐린 접근성이 극도로 제한됐을 것입니다. 약을 대중이 접근할 수 있게 만드는 결정의 대표적 선례로 기록됩니다.


왜 중요한가

밴팅과 매클라우드의 노벨상은 "호르몬 결핍은 호르몬 보충으로 치료할 수 있다" 는 원칙의 정립이었습니다. 이 원칙이 이후 호르몬 치환 요법(hormone replacement therapy) 이라는 큰 분야를 낳습니다. 갑상선 저하증에는 티록신, 부신 부전에는 코르티솔, 폐경에는 에스트로겐, 성장 장애에는 성장호르몬 — 모두 이 원칙 위에 서 있습니다.

더 큰 의미는 "과학 발견을 공공재로 만드는 결정" 의 선례입니다. 토론토 대학의 1달러 특허 양도는 이후 페니실린 대량 생산의 개방적 접근, 소아마비 백신의 공공 배포 등 많은 결정의 선례가 됩니다. 인슐린이 지금 여전히 접근성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현대 인슐린 아날로그의 가격 문제), 그 논쟁 자체가 원본 결정이 만든 기대의 결과입니다.

우리에게 남긴 교훈이 있습니다. "완고한 아이디어와 신중한 실험실이 만날 때 혁명이 일어난다" 는 것입니다. 밴팅의 완고함과 매클라우드의 신중함 — 두 사람은 성격이 정반대였고 자주 부딪혔지만, 그 대립이 발견을 낳았습니다. 완고함만이었다면 실험 없이 끝났을 것이고, 신중함만이었다면 결정적 시도 없이 끝났을 것입니다.

지금 이 문장을 읽는 중에도 세계 1형 당뇨병 어린이 수백만 명이 인슐린으로 살아있습니다. 그 어린이들의 생명이, 1920년 10월 30일 밤 캐나다의 잠 못 이룬 정형외과의의 노트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인슐린의 신호와 임상 회복 요약: 인슐린은 세포에 글루코스 흡수 신호를 보내는 호르몬. 결핍 시 혈당이 높아도 세포는 굶고, 지방·근육이 소모되며 케톤산증으로 진행. 인슐린 투여로 이 회로 전체가 복원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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